<연중 제6주일> 2025.2.1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루카6,20.24)
'행복을 말하자!'
오늘 복음(루카6,17.20-26)은 '참 행복과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참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십니까???'
인간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의 개념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하다는 사람, 행복을 말하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많아도 불행하다는 사람, 불행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이 찾아왔는데도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고통스러운 일이 없는데도 늘 짜증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행복은 매우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행복하다면 그것이 행복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참 행복과 불행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세적인 것만을 위해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며 살아가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도, 예수님의 오늘 복음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떠나갈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냉담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십니다. 행복을 말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이제와 영원한 행복'을 주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땀을 흘리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되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희망'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죽음 저 너머에서 맞이하게 될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 목적과 희망을 믿는 사람들은,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불편함들을 이겨냅니다.
더 나아가 오지나 가난한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처럼, 어떤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그 불편함을 청하고, 그 불편함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17,7/제1독서)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화답송)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15,17-19/제2독서)
우리에게 참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땀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지금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
지금 행복을 말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루카6,23)
이병우 루카 신부